Fake Nerd

초인종을 눌렀는데 문을 연 건 재민이었다. 잔뜩 골이 난 얼굴이다. 재민이는 몸을 살짝 비켜주며 안으로 들어오라 고갯짓을 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이민형의 집에 발을 들인 건 처음이다. 오전강의에 같이 가자는 내말에 이민형은 고개를 끄덕여놓고 늦잠을 자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연결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의 주...

옆에서 떠드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모든 글을 다 읽어 내렸다. 눈가가 뜨거웠지만 눈을 감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눈에 힘을 주고 참았다. 마지막에 화면을 넘겨 첨부되어있던 이민형의 사진까지 확인했다. 난도질하는 글과 다르게 첨부된 사진 속 이민형은 턱시도를 입고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

이민형이 널브러진 내 다리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걸치곤 허벅지 안쪽을 누른다. 아! 잔뜩 뭉친 근육에 아픔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손을 휘저어봤자 이민형은 손아귀의 힘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 아! 진짜 아파. 조금만 살살해.” “너 운동 좀 해야겠다.” “이건 너 때문이잖아.” 내가 평소엔 너보다 활동량 많아. 괜히 민망해져서 몸을 틀어 침대 ...

결국 우리 둘은 신나게 뛰어놀고 나란히 감기에 걸렸다. 같은 곳에서 바이러스를 몸에 들였는데 작용하는 곳은 서로 달랐다. 나는 코에 나는 이민형은 목에. 나는 코가 막혀버려 입으로 숨을 쉬었고 이민형은 목이 부어 말을 잃었다. 기침을 하는데 내 폐가 아플 정도의 소리가 났다. 그 때마다 미안해져 작은 머리통을 가득 끌어안으며 코를 훌쩍였다. 공통적인 증상은...

‘딸, 방학했는데 어떻게 한 번을 안내려와. 보고 싶어.’ 딱 봐도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빠의 목소리에 당장 기차표를 끊었다. 서울역에서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는 이민형의 배웅을 받으며 아주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도시 근교에 위치한 우리 집은 KTX도 가지 않는 시골이다. 무궁화호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달라진 거 없어 보이는 역들을...

“왜 전화를 안 받지?” 오랜만에 밖에서 하는 데이트였다. 재민이와 살고 있는 자취방 앞으로 가겠다는 나에게 이민형은 자취방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민형은 대학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 그러니까 진짜 가족단위로 사는 아파트. 분명 자취방이라고 했었는데 아파트 단지가 찍힌 주소에 나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이민형의 무심함을 다시 깨닫게 됐을 뿐이었다. 생...

이민형을 쭉 오랜 시간 보고 있으면 마지막엔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잘났다는 생각. “민형아.” “왜.” “너는 못하는 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얼굴에 확 떠오른다. 내가 가끔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민형이 잘난 건 사실인데 스스로는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민형의 잘남에 진심인 편인데. “왜 그러는데.” “뭐가...

그런 날이 있다. 웃음이 마르고 나는 땅위로 발을 딛고 서있는데 분명 그런데. 자꾸 저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라 고개 숙여 내 발을 확인하게 되는 날. 사소한 습관이나 생활 패턴은 지겨우리만큼 똑같은데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까지 모두 같은데 나만 달라진 것 같았다. 내가 달라졌다는 사실 하나로 세상은 이렇게 뒤바뀌는 구나. 봄의 한복판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지어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거기에는 필히 애정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름이라는 것들을 사랑한다.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재현오빠는 말랑 복숭아, 수영이는 수영이의 영어 이름인 조이. 물론 아무 때나 부르...

무조건 듣기 무조건 ㅠㅠ 이민형과 나는 다르다. 사람마다 어떻게 다 같겠냐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얼마나 달랐냐면 이민형이 태어난 캐나다에서 여기 대한민국까지의 거리만큼 달랐다. 일단 학교에서의 동선부터 겹치는 곳이 없었다. 주로 학과일과 애들을 챙기기 위해 과실과 랩실에 붙어있고 그 외에도 안 가는 곳이 없는 나와 다르게 이민형은 도서관, 집 그리고 내...

집까지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이민형은 한번 와봤다고 길 한번 묻지 않고 자취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어색할 틈 없이 떠들었다. 대부분 내가 질문하고 이민형이 답하는 질의응답의 시간이었다. 자취방 위치는 어디인지 좋아하는 영화는 무엇인지 질문하다 보니 내가 이민형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궁금했던 것도 전부 쏟아냈다. 그 ...

정리를 해보자.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어제 이민형의 시선을 피해 도망쳐 나왔고 따라 나온 이민형이 과거를 밝히고 난데없이 자기 입술을 물라고 했다. 그렇게 말한 이민형도 이상했지만 거기에 정말로 입술을 문 내가 더 이상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니 점차 얼굴에 열이 올라온다. 그 다음에는 어땠더라. 한참을 대학가에서 서로 놔주지 않고 키스를 했다. 입술을...